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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밑줄긋기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 "뱃살이 꾸는 꿈"

by 가제트21 2023. 7. 29.

뱃살이 꾸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쓴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뱃살이 꾸는 꿈> 전체를 가져왔다.

물론  책도 전자책으로 읽었다.

나중에 저작권 어쩌고 하면  글을 그냥 날리면 된다.

중략할만한 단락을 찾아 날려버리려고 해도 없다.

그만큼 깔끔하단 얘기다.

아래를 일단 읽어보자


 

샤워 물줄기 속의 뱃살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어긋나버린 사랑에 대한 향수가 떠돌던 옛 SF영화,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의 <솔라리스>(1972)가 떠오른다. 저 멀리 우주에는 몽환적인 행성 솔라리스가 있고, 그 솔라리스의 한가운데에는 치열한 사유를 지속하고 있는 '생각하는 바다'가 있다. 지구인들은 '생각하는 바다’를 탐구하고자 우주 스테이션을 건설한다. 그러나 탐구 과정에서 거꾸로 자신들의 과거를 만나게 되고, 그만 미쳐버린다.

 

21세기 지구 한구석의 아침, 둥근 행성처럼 부푼 아랫 배를 안고 샤워하고 있는 중년 사내가 있다. 참을 수 없이 무거운 그의 복부 한가운데는 근거를 알 수 없는 허세처럼 팽창하고 있는 지방질의 바다가 있다. 그의 바다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입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을 때도, 온 나라가 경제 위기에 빠졌을 때도, 월드컵 거리 응원을 했을 때도, 투표를 했을 때도, 창당을 했을 때도, 여론조사로 단일화를 시도했을 때도, 탈당을 했을 때도, 그의 뱃살은 신도시 부근 보신탕집처럼 끝내 생각이 없었다. 그의 뱃살은 '생각하지 않는 바다' 바텀리스 bottomless다. 바텀리스를 탐구하기 위한 가내 스테이션, 샤워 부스에서 짐짓 엄숙한 얼굴을 하고서 뱃살에 대해 생각한다.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 있는 이 무책임한 비무장지대를 묵상한다. 아, 뱃살은 평생 긴장해 본 적이 없구나, 지배층이로구나, 늘 여유롭구나, 지방층이로구나, 천진 난만하구나, 진짜 혁명을 겪지 않았구나, 부드러운 옷 아래 숨어 있었구나, 이데올로기적이구나, 맛이 없다고 불 평하면서도 한사코 음식을 더 달라고 해서 먹었구나, 많은 것을 착복했구나.

혹시 뱃살은 몸 전체가 사실 뱃살임을 감추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과 머리조차 뱃살의 일부라 는 것을 숨기기 위해 뱃살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 이후에도 이 질문은 중년 남자의 뱃살처럼 이 사회에서 부풀어왔다.

 

민주투사들이 집권하여 독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양태를 보여줄 때, 과거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기립박수를 받을 때, 새롭게 등장한 정치가 한층 더 구태일 때, 진보의 간판이 보수만큼 낡아 보일 때, '진보적' 지식인이 여성의 고용에 대해 오히려 소극적일 때, 인권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도외시할 때, 저 정치인들이 모두 직선제에 의해 뽑힌 이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 지금 교통정체를 탓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차가 바로 그 교통정체를 만들고 있음을 깨달을 때, 뱃살과 나머지 몸 간의 경계는 점점 더 의문시되었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다고 오래전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적대를 일삼는 이 사회의 정치언어는 사실 모두가 한패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과거가 뱃살의 거대한 분비물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제정신으로 샤워 부스에서 나와 출근길에 오를 수 있을까.

보수든 진보든, 민주든 독재든, 공이든 사든, 좌든 우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과거 우리의 정치적 삶을 구획해온 구분들이 부풀어 오른 뱃살에 의해 흐려진 오늘, 정치를 살아 있게 하던 동력도 시들었다. 정치는 구분에서 출발한다. 구분을 지음에 의해 비로소 복수의 단위들이 생겨나고, 복수의 단위들이 존재할 때 비로소 관계가 존재한다. 그 관계가 특유한 정치의 역학을 만든다. 그렇다면 오늘날 정치의 중요한 과제는, 앙상해진 도덕적 진정성에 너무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 구분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뱃살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결국 몸 전체가 뱃살이라면, 뱃살이 뱃살을 개혁할 수 있는가? 피하지방이 내 장지방을 개혁해야 하는가? 그 개혁은 어떤 정치경제를 전제한 것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존재의 가장 정치적인 부위인 뱃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 생각마저 뱃살이 꾸는 꿈에 불과할지라도. (2015. 7. 14)

(220~223P)


김교수한테는 미안하게도 나는 아직 뱃살이라는 존재를  모르기에 샤워하면서 뱃살 부분을 쳐다보는 이유에 대해서는 공감을 못하지만 다른 것들은 대체로 수용한다.

근데 요로콤 정치학 교수답게-이렇게 호칭하는  칭찬이 아니다- 두리뭉실하게 비평하는 방법 또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차피 정치권 놈들이란  그게 그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뽑은 것들의 행태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취지도 들어가야 한다.

그게 보수든 진보든, 민주든 독재든...

정치는 구분에서 출발하지만 어차피  구분에 시민들이   있는 게 사실이고  편을 많이 만들면 이기는 구조가 현재의 정치 세상이며    편을 많이 만들면 그다음엔  몰라라 하면서 운동을 안 하는  정치 세상이다.

그러니 교수라고 해서 뱃살을 비유로 들면서 이놈 저놈 싸잡아서 비평만   아니라  뱃살이 안 나오게 운동-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또한 아쉽게 빠져있다.

 

뱃살만 생각하지 마시고 운동을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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