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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좋다2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두번째) 나에게도 ‘빨간 날’들로만 가득 찬 날들이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비행기를 탔고 나에게 말을 거느라 눈이 시뻘게지도록 걷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다 심심하면 케이크 한 상자를 사서 하루 종일 들고만 다녔다. 매일매일 기념일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원고를 쓰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어느 낯선 곳에 도착해서 역에 나가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오는 일이 좋았다. 기차 시간표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가야 할 목적지를 찾은 듯이 하루 동안의 기차 시간표를 수첩에 옮겨 적고는 되돌아오는 길에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야. 이곳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중얼거리는 것. 그것은 기념일에 어울리는 대사였다. (211page 잘 다녀와 중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적마다 이상하게 속이 시원히 뚫리는 기.. 2020. 2. 9.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아주 푸른 밤 당신이 맘에 든다. 내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한다는 것은 푸른 바다 밑,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어내리고 싶어한다는 것. 그러면 당신은 눈을 뜨고 나를 보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마는지 실험하고 싶은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내면서 옆자리에 앉은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자 했을 때 당신이 나를 따라 눈을 감는지 아니면 두려워 정면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다. 칠레에서 서른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달려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아 버스 안에서 죽겠구나 싶었지만 대여섯 시간을 잠으로 흘려보낸 뒤 문득 올려다본 파란 밤하늘 덕분에 일순간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빈 옆자리의 의자도 내가 앉은 의자처럼 뒤로 눕힌 다음 몸을 비스듬히 눕혀 밤하늘을 올.. 2020.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