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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밑줄긋기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두번째)

by 가제트21 2020. 2. 9.

 

나에게도 ‘빨간 날’들로만 가득 찬 날들이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비행기를 탔고 나에게 말을 거느라 눈이 시뻘게지도록 걷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다 심심하면 케이크 한 상자를 사서 하루 종일 들고만 다녔다. 매일매일 기념일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원고를 쓰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어느 낯선 곳에 도착해서 역에 나가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오는 일이 좋았다. 기차 시간표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가야 할 목적지를 찾은 듯이 하루 동안의 기차 시간표를 수첩에 옮겨 적고는 되돌아오는 길에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야. 이곳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중얼거리는 것. 그것은 기념일에 어울리는 대사였다.
(211page 잘 다녀와 중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적마다 이상하게 속이 시원히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한 점 티 없는 것은 찬물처럼 가슴을 씻어내준다. 진짜로 많은 것을 몰랐던 오래전의 나로 돌아가는 마음이 되면서 심장까지 맑아지고 순해졌다. 조금 안다고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많이 아는 체하는 날들은 고개 숙이지 못하게 한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면 남보다 먼지를 더 들이마시게 되고 그 먼지는 씻겨나가지 못하고 몸 안에서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생각과 함께 돌이 된다.

조금은 바보 같기로 한다. 눈을 감고 잠시만이라도 모르기로 한다.
(276 page)

 


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여행은 직진하는 것도 아니고, 백 미터 달리기처럼 백 미터를 다 왔다고 멈춰 서는 것도 아니라서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으니 다행이다.

그때까지 내게 아무도,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오래 그리워했던 것을 찾아 나서기에는 언제나처럼 혼자여도 좋겠다. 다만 겨울이면 좋겠다.

눈이 많이 내려 그곳에 갇혀도 좋겠다.
(445 page 그 날의 분위기 중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나의 퇴락은 어쩔 수 없겠으나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난으로 늘 내 자신을 볶아칠 것만 같습니다. 이 오만을 허락해주십시오.

아, 그러고보니 『그리스인 조르바』는 마침 내가 배에서 지내며 세 번인가를 읽었던 그 소설이기도 하네요. 그 시절, 세 번을 읽었던 이 한 권의 소설 말고 나는 과연 누구를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475-476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중에서) 

 



- 거기에 누가 손 잡아줄 이가 있나요.

요리하고 글 쓰는 선배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문자 한 줄에 괜히 또 심줄이 끊어질 듯 아프다. 몸살이 심한데 복통까지 겹쳤다. 가방에 든 비상약이 꽤 되건만 꼬박 이틀 동안 챙겨 먹어도 낫질 않는다.

몸이 안 좋다는 말은 안 했지만, 선배는 또 먼 곳에 있다는 내게 ‘혼자서라도 씩씩하게 잘 다녀라’ 보낸 문자일 수도 있는데 내 몸은 계속 풀썩 꺼진다.

- 언제는 나에게 손 잡아줄 사람 있었겠습니까?
라고 까칠한 문자를 하려다

- 손 말고 모가지 묶어줄 사람 구합니다.
라고 허튼 문자를 하려다

- 네, 어떻게든 구해야지요
라고 쓸쓸히, 안간힘을 보태 문자를 보낸다. 그런 문자를 보내고 나니 만약 손 잡아줄 이를 구하게 된다면 아픈 몸이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 지낼 때보다 아플 확률은 더 높다.

바깥에 있어서 소나기를 만날 확률도 높고, 나를 묶어둘 그 무엇이 없어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될 확률은 더 높다.

저녁에는 소프라노의 독창회에 갔다가 중간 쉬는 시간에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와버렸다. 소프라노가 높은 음으로 관객들을 주무를 때마다 옆구리의 통증이 더 심해서였다. 돌아오는 길은 추웠고,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은 시리다 못해 화상을 입은 부위처럼 무감각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곧바로 침대 위로 쓰러지면서 생각했다.
손이 문제구나. 그놈의 손이…….
그리고 또 생각했다. 마음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냐구.
(420-425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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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의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가는 문장들이 있다.

돌아와 다시 읽으면서 밑줄을 그어놓는다.

 

그의 글들이 내 뒷통수를 후려갈기거나 며칠을 끙끙거리게 만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같이 여행을 떠나서 어느 작은 시골 도시의 한적한 여관 방에 짐을 풀고

조그만 편의점에서 라면과 소주를 사가지고 와서

둘이서 한잔씩 주고받으며 라면 한 젖가락 먹으며 이런저런 시시한 얘기 나누는 것 같은 그런....

그렇게 나눈 장면들은 잊을 수가 없다.

무엇을 얘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날의 그 풍경은 머리 속에 새겨진다.

 

이병률의 책은 그런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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