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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by 가제트21 2020. 2. 9.

 

아주 푸른 밤
 

당신이 맘에 든다. 내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한다는 것은 푸른 바다 밑,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어내리고 싶어한다는 것. 그러면 당신은 눈을 뜨고 나를 보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마는지 실험하고 싶은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내면서 옆자리에 앉은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자 했을 때 당신이 나를 따라 눈을 감는지 아니면 두려워 정면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다.

칠레에서 서른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달려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아 버스 안에서 죽겠구나 싶었지만 대여섯 시간을 잠으로 흘려보낸 뒤 문득 올려다본 파란 밤하늘 덕분에 일순간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빈 옆자리의 의자도 내가 앉은 의자처럼 뒤로 눕힌 다음 몸을 비스듬히 눕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을 세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하늘의 푸르름을 싫증날 정도로 노려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이마가 시큰해질 정도의 슬픔이 찾아왔다. 아름다움은 슬픔을 부른다. 유난히 눈부신 아름다움은 밤에 더 빛난다.

나는 무엇 때문에 가고 있는가. 무엇을 따라가고는 있는가. 복잡한 여러 생각으로 더 울컥해지는데 뒷자리에서 낮고 두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시처럼 멋진 밤이야.

잘못 알아들은 것도 같고 나더러 들으라는 말로도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이 씨익 웃고 있었다. 어쩌면, 노인이 들고 있던 포도주 병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냥 그렇고 그런 소리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 앞주머니에서 빈 콜라 병을 꺼내 나에게도 조금만 포도주를 나눠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 이토록 좋은 밤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서로가 아닌, 푸른 밤하늘에 대고 건배를 했다. 각자의 가장 깊숙한 그 무언가에 대고 그렇게 당분간은 푸르겠다고 맹세를 하는 사람들 같았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여전히 인간적인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만이 세상을 이끌어갈 거라고, 나는 그 밤을 내 몸에 새기기로 했다.

(397-400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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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들이 있었다.

별을 헤다가 포기하고 그냥 몸에 새기시로 하자고 하는 그런 밤들.

 

이민 초기에 친한 가족과 차로 일주일간 Yellowstone National Park에 갔었는데

그 첫날 밤에 하늘에 떠 있는-아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 별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고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모닥불 피워놓고 야외 의자에 앉아서

그 식구들과 우리들과 맥주 한 캔씩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별천지의 밤에 대고 건배를 했다.

 

별 아래서 하는 모든 이야기는 전설이 된다.

이토록 좋은 밤인데...

 

나도 그 밤을 내 몸에 새기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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