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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는 것들/수필,꽁트,기타

(꽁트)빈대

by 가제트21 2022. 10. 26.

빈대

                                       

 

 “우리는 음지에서 살고 양지를 흡입한다” [1]

아침에 부랴부랴 나가다 보면 늘 마주치는 현관 위에 걸려 있는 가훈 액자.

오늘도 모친은 여수와 더불어 그 액자를 슬쩍 보더니 천 원짜리 한 장을 준다.

점심, 저녁, 버스, 담배 값으로.

 

부친이 30년 직장 생활 동안 머릿속에 주입된 원훈을 자신에게 알맞게 변조한 후에 집안 식구 모두에게 따라 하도록 만든 가훈이다. 여수 본인도 그 가훈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체질에 맞는지 부친보다 더 양지를 흡입했다.  

천 원짜리 한 장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지만 아마도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꼬깃꼬깃해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점심을 위해서 천원이 나올 필요는 없었다. 단지 학교 식당 배식기 옆의 수저통에 놓여있는 쇠 젓가락 한 세트면 충분했다. 아니, 배불리 먹고도 빵 조각 두 개와 짬뽕이 된 국 다섯 그릇을 남길 수 있었다. 오뽕 이빵의 기적이 거의 매일 만들어졌다. 

 

여수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친구와 선, 후배들을 수시로 찾았고 그들은 “어서 와” 하면서도 썩 반기는 모습은 아니었다. 기적을 보고도 반기지 않는 것은 이천 년 전에 이름도 비슷한 예수를 핍박했던 바리새인들과 비슷했지만 괘념치 않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선지자는 외로운 법이었다.

 

저녁은 그 대신 여수가 그의 전 재산과 이빨(?)로 대접하는 시간이다. 거의 매일이 김종찬 노래처럼 “토요일은 밤이 좋아”였다. 즐거운 만찬을 만들기 위하여 취권 흉내를 내다 동네 양아치한테 눈이 밤탱이가 된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 취권과 새로운 스타일의 음주가무를 매주 선보였다. 물론 속편과 3편을 하루에 연이어 찍는 강행군이 자주 있었지만 스타는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모친의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점심때마다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를 위해 마리아처럼 아낌없이 베푸는 선배 누님들의 하해와 같은 은총 그리고 축복을 가장한 여수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강제로 십일조를 바치는 후배들의 갸륵한 정성으로 모금 함은 그다지 부족하지 않았다.

 

때때로 부족분은 학교 근처 시장 이모들 장부에 빨갛게 기록되었다. 이모는 모친의 여동생이 아니라 동목교(東木敎)의 열렬한 신도들이었다. 그러나 거의 매일 나타나서 매출을 올려주니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을 할 뿐이었다.

 

여기서 잠깐, 동목(東木)에 대해서.

당시 폼이란 폼은 다 잡는 영화배우가 있었으니 마카로니 웨스턴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는데 친구들은 여수가 그 배우를 닮았다고 해서 (얼굴이 아니라 폼) 여수를 클린트 라 불렀고 이스트우드 즉, 동목(동쪽 나무)은 자연스럽게 말빨로 먹고사는 여수가 창시한 종교(宗敎)의 이름이 되었다.

 

로빈 훗은 셔우드 숲의 동지들과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부자들의 물건을 빼앗았고 클린트는 자기 뱃속을 위해 신도들의 주머니를 털었다는 것만 다를 뿐 잡식성 설교(?)로 동목교는 그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교주의 한 말씀이라도 더 듣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신도들을 위해 여수는 자주 신도들과 밤을 같이 보냈다.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친에게 용돈 얘기를 해봐야 씨도 안 먹힐 것이 뻔하기에 궁여지책으로 고안한 것이 거리 전도였다. 클린트를 닮아서 그런지, 출중한 말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방법은 제법 잘 먹혀서 많은 헌금도 모아지고 교세는 더욱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 교주의 모친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산에서 내려오거라.”

 

처음엔 무슨 말씀인지 잘 몰랐다. 여수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혼잣말로 이렇게 정리했다. ‘이제 때가 찬 것 같다. 말씀에 순종하자. 나중에 성모 마리아 같은 위치에 올라가실 분이 아니던가.’

 

신도들에게 최후의 만찬 소식을 알렸다. 우연히도 12명이 모였고 첫눈이 오는 날, 이모 집을 찾았다. 이모는 경계의 눈초리와 썩은 미소로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는데, 왠지 최후의 만찬을 직감하는 눈치였다.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올라왔을 때, 이제 잠시 동목교를 접는다는 발표를 했다. 더 이상 나의 설교에 미련을 갖지 말아라. 오늘 이후로 여인숙에서 같이 자면서 훈련하는 것을 마치려 하노라. 이제부터 학생의 신분답게 공부에 매진하자 등등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헛소리 비슷한 설교를 하고 있으니 신도들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여수에게는 이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이었다. 이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전설이 될 시간이다. 여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이모에게 상냥스럽게 말하였다. “이모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제 것이 모두 얼마죠?” 이모는 외상 장부를 몇 페이지 넘기더니 빨갛게 표시된 금액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오늘 다 갚을라꼬?” 미소 띤 얼굴이 창으로 변하는 건 잠깐이었다. “아니요. 오늘 것까지 더 하게요.” 혀 꼬부라진 대답 후에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모의 손에 외상 장부가 들려지더니 여수의 왼쪽 뺌을 후려치고는 이렇게 외쳤다. “빈대도 낯짝이 있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후배들은 지금까지 모시고 따랐던 교주가 당하고 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숙덕 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도 빈대 붙더니 오늘 아주 가는구먼.” 왼 뺨을 맞을 때보다 더 가슴 아픈 말이었다. 예수의 비애가 가슴으로 전해져 왔고 그 예수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래서 묵묵히 오른뺨을 내밀었더니 이모는 씩 웃더니 “와, 더 때려 달라꼬? 오냐, 내 오늘 빈대 한 마리 잡을란다.”.

 

“짝” 소리가 아니라 “퍽”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여수의 몸은 탁자 위를 잠깐 비행했다. 그런데 추락한 몸통이 탁자를 쓰러트리면서 중앙에 있는 둥그런 화덕을 쳤다. 화덕도 결국 기우뚱하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화덕 속에 있던 숯불이 쏟아지면서 마침 의자 위에 있던 신문지에 불이 옮겨 붙어서 금세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모는 순식간에 벌어진 이 광경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아이고,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네.” 여수는 넘어진 채로 웃으며 이렇게 기도했다. “다 이루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모든 속담을… 아버지여 저들은 저희가 한 행동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하여 주소서.”

 

넘어진 채로 실눈을 뜨고 좌우를 살피니 그동안 벽 틈이며 화덕 밑에 기생했던 빈대들이 살기 위해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너희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나 여수는 곧 부활할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삼 일 후, 불이 다 꺼진 포장마차 바닥에서 발견된 건 여수가 아니라 도망치지 못하고 불에 탄 빈대 세 마리였는데 가운데 빈대는 다른 두 마리에 비해 훨씬 크고 여수를 많이 닮았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1] 국정원의 원훈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모방한 가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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