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에게 개가.
가끔은 내 속에 잠자던 추잡한 것들이 급박한 상황을 만나면 저지할 틈도 없이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이웃 사랑, 인간에 대한 배려, 왼 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밀라 등 주옥같은 말씀들이 들어오면서 똥 냄새 가득했던 마음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발효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곰팡이가 급속히 번지며 마음을 순식간에 갉아먹더니 벼락 맞은 것처럼 입이 좍 갈라지면서 터져 나온 한 마디.
“씨X 개XX” 잠자고 있던 한국말로 된 욕이었다.
왜 한국말이 튀어 나왔는지, 사건 현장을 녹화 필름으로 다시 보자
밤새 내린 눈으로 빠득거리는 월마트 주차장에 대충 주차하고(선이 안 보여서 다들 대충 주차한 상태였다), 장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보통은 앞면 주차가 보통인데 그 빠득거리는 주차장 사잇길에서 후면 주차를 하려고 사람들을 계속 보내면서 연신 후미 등을 깜박거리는 미니 밴이 한복판에서 부릉거리고 있었다.
나 역시 추운 날씨에 빨리 차를 타려고 빠른 걸음으로 그 차 옆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차가 후진을 하면서 거의 나를 칠 뻔한 것이다. 나는 놀라서 후다닥 그 차를 스치듯 피하였다. 어이가 없어서 지나치면서 빤히 그 운전자를 쳐다보는데, 웬걸 나를 향해 뭐라고 차 안에서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건대 ‘왜 자기 차가 후진하려는데 그 옆을 지나가’ 였을 것이다. 썬글라스를 낀 돼지급의 뚱뚱보였다. 보통 돼지급 선수들은 마음만은 대체로 넉넉한데 그 돼지는 까칠했다.
문제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에 기울어진 내 마음이었다. 그동안 마음에서 차근차근 올라오던 발효가 멈추더니 갑자기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차 안에 있는 돼지에게 말할 수는 없어서 ‘별 거지 같은 놈 다 보겠네’라는 참으로 순화된 말을 창문을 통해 날리고 내 차로 빠르게 걸어왔다.
그런데 문제가 더 악화되었다. 차에서 내린 돼지가 갑자기 나를 향해 큰소리로 뭐라고 하더니 돌아본 나를 향해 흰 돼지 앞발(?)의 가운데 발가락을 쭉 올린 것이다. 드디어 내 안에서 잠자던 곰팡이들이 전부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모여라 꿈동산이 아니라 모여라 입술로.
순식간에 모인 곰팡이들이 빠르게 터지고 말았다. “야 이 개XX 야”. 돼지에게 격이 높은 개라니… 순간적으로 아차 했지만 이미 터진 댐이었다. 빠른 속도로 모이기 시작한 살아 있는 곰팡이들이 계속 쌓이면서 후속타로 무언가를 계속 쏟아내긴 했는데 무엇을 들이부었는지 입술이 한 일을 머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왼뺨이 맞은 것을 오른뺨이 모르는 것처럼.(이 비유는 전혀 맞지 않는데 마음에는 쏙 든다)
그 흰 돼지도 뭐라고 울부짖었는데 당연히 해석이 안 되었고 해석할 상황도 아니었으며 해석해서는 안 될 소리였다. 흰 돼지는 해석 안 된 소리만 남겨놓고 월마트로 뒤뚱뒤뚱 사라져 버렸다.
내가 쏟아부은 '강아지의 속된 애칭'들과 흰 돼지가 공중에 흩뿌려 놓은 '돼지 새끼'들이 아침의 햇살과 흰 눈에 반사된 빛 위에서 찬란하게 똥을 싸고 있었다.
일단 너무 추워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한참을 개처럼 헥헥대며 앉아 있었다. 눈 쌓인 아침이었고 무엇보다 씩씩한 하루를 시작하려는 출발점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어서 이런 개소리로 아침이 얼룩지었던가. 태양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고 내 숨소리는 천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장을 보고 차로 돌아가는 주차장 길. 후진하던 차를 못 보고 후다닥 피했던 나. 그걸 보고 욕한 뚱뚱한 백인. 그걸 보고 뭐라 하던 나. 그걸 보고 욕하던 돼지. 그걸 보고 또 욕하던 개.
머리가 정리되면 다음은 마음이다. 좀 더 참아야 했나? 가운데 손가락을 보고도 참으면 그것이 바로 개가 아닐까? 마음은 여전히 두 갈래다.
결국 똥 싸고 밑 닦지 못한 채로 어기적거리며 차를 몰고 나왔다. 산다는 건 항상 이런 식이다. 길은 둘 중 하나인데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한 채 운전하는 거 말이다.
이럴 때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해석만 있어도 마음은 좀 더 편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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