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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는 것들/수필,꽁트,기타

봄을 갈아 마시는 방법

by 가제트21 2020. 5. 30.

봄을 갈아 마시는 방법

 

                                                      

동작 그만!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동작 그것밖에 못하나!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일어서.

대가리 박아!

 

조교는 “박아”에서 “아”를 유난히 강조했다. 거의 악을 쓰듯 내뱉는 조교의 벌어진 아가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잠깐. 대가리- 빡빡머리와 철모가 일체가 된 까맣게 그을린 목 위의 물체-를 땅에 박으니 땀이 눈으로 들어오고 푸른 하늘이 가랑이 사이에서 깜박거렸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를 부르고 싶은 나의 아가리는 조교의 명령대로  ‘멋있는 사나이’를 부르느라 모가지 밑에서 악을 쓰고 있었다. 악을 써야 짧게 박고 더 악을 써야 서 있을 수 있는 세월이었다. 오월의 햇살은 ‘ㅅ’ 자로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주룩주룩 들어오고 있었고 땀은 군복으로 스며들면서 봄 햇살을 마중 나오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박은 채로 악을 쓰며 봄을 갈아 마시는 중이었는데 조교는 한 술 더 떠서 이빨을 눈이 부시게 드러낸다. “대가리 제대로 안 박은 놈들은 다 갈아 마셔 주겠어”

 ‘조놈의 주둥아리는 누가 안 갈아 마시나? ‘ 

 

삼십몇 년 전의 봄은 그래도 갈아 마셔 줄 만했다. 데굴데굴 굴러도 같이 굴렀고 박아도 같이 박고 담배 한 개비도 같이 나눠 폈으니 봄 아니라 겨울이라도 다 우리 편이었다.

 

조교는 비록 우리를 갈아 마셨지만 우리는 대신 봄을 갈아 마셨으며, 땅과 수없이 키스하면서도 하늘을 거꾸로 보며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제대 후엔 봄을 갈아 마실 필요도 없고, 마셔 본 적도 없이 다만 나이만 갈아 마시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강산도 몇 번 변하고 봄도 변하고 나도 변했다. 대가리와 땅의 오랜 키스로 인한  부작용으로 앞 머리는 대충 날아가고, 반복된 쪼그려 뛰기의 후유증이 이제 치고 올라와, 앉을 때마다 ‘아고고’를 외치게 만든다. 

 

캘거리 이민자에게 봄, 특히 오월은 자주 갈아 마셔줘야만 하는 계절이다.

 

일 년의 반을 차지하는 겨울의 찌든 때를 털어 내려면 봄의 향기를 그냥 들이마시면 때가 덜 빠지고 갈아서 마셔야 한다. 그러나 봄을 깊이 마시기엔  4월은 아직 춥고 6월은 이미 덥다. 5월은 가끔, 일 년의 계절 변화를 하루에 모두 느끼게 해주는 해괴한 일도 벌이지만, 따스한 햇살과 함께 봄을 마시기 적합한 날들이 제법 두툼하기 때문이다.

 

캘거리에서 5월의 봄을, 그것도 갈아 마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부리부리 박사*처럼 하면 된다. 도토리 세 알에 장미꽃 한 송이 그리고 달님 속 계수나무와 별똥별 하나를 믹서기에 넣고 잘 섞게 갈아 준 다음 머그잔에 부은 후 봄볕이 잘 드는 데크 혹은 공원 벤치에 앉는다.

 

그리곤 나머지 주제가를 차분히 불러준다. “이것저것 쓸어 모아 발명을 한다. 발명을 한다.” 그리고 마무리는 이렇게. “나는야 부리부리 박사!”. 

 

캘거리에서 봄을 갈아 마시는 방법이다. 물론 동요나 다른 만화 주제가로 바꿀 수도 있다.  최근까지도 방영되고 있는  ‘방귀대장 뿡뿡이’를 부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아니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질 수 있다면 우린 봄 아니라 여름,  그리고 가을도 점잖게 갈아 마셔줄 수가 있다. 

 

군대에서의 봄은 악을 쓰며 갈아 마셨지만 원래 봄이란 게 그렇게 하면 오래 못 가는 법이다.  짧을수록 여유롭게 즐겨야 한다. 온 지가 얼마 전인데 벌써 가려느냐 라는 푸념을 하기보다  동화같이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순간들을 떠올린다면 봄은 언제나 내 편이고 따스하다.

 

삼십 년 전에 –누군가에겐 사십 년 전이고 이십 년 전 이겠지만- 조교를 대신해서 갈아 마셨던 봄의 끈적거림은 지우자. 십 년만 더 올라가서, 그때 불렀던 동요 혹은 만화 주제가 하나만 불러봐도 봄은 기꺼이 스스로 갈아서 머그잔 속으로 풍덩 들어갈 것이다. 

 

나는 나는 부리부리 박사! 

 

 

                                                                       ⓒ 정동극장

 

*부리부리 박사: 1976년 4월 15일 ~ 1978년 4월 6일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에 한국에서 방영된 인형극으로 KBS에서 자체 제작했으며 2004년 <돌아온 부리부리 박사>로 정동극장에서 다시 공연했다. (나무위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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