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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는 것들/수필,꽁트,기타

시작은 연애편지 대필

by 가제트21 2023. 7. 28.

시작은 연애편지 대필                   

 

“철수야 놀자”

친구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놀자고 합니다. 전 대꾸조차 안 합니다.

그런데 또 “철수야 놀자….” 귀에 익은, 아니 언제나 듣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절 부릅니다.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국민대표 이름 ‘철수’는, 그러나 딱 한 사람 ‘영숙’씨가 불러야 달려갈 수 있습니다. 제 이름 ‘철수’는 영숙 씨가 불러야 온전히 제 것이 됩니다.

어쩌고 저쩌고 ……………………………” 

 

이 수경(수경은 전투경찰 대원의 최상 계급으로 육군의 병장에 해당)은 첫 문장을 읽으며 대단히 흡족해했다.

“짜식, 제법이란 말이야.”

“야, 근데 너무 내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좀 걱정되네.”

“아! 참, 이 수경님! 여자들은 일단 좋은 문장이 가슴에 들어오면 그걸 누가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둘의 대화를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듣고 있던 동기 최 수경도 슬쩍 끼어 들어온다.

“유비스!”-그 당시 내 별명이, 회식 시간에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좀 냈다고 유비스가 되었고 동기들은 그냥 ‘비스야’ 그렇게도 불렀다’-

“예 일경(육군의 일병에 해당) 유비스”

“아, 됐어. 내 앞에선 너무 각 안 잡아도 되고, 내 편지도 한 번 해주라. 이 수경 것만 해주고, 나는? ” 또 한 명 늘었다. 누구 명인데 거절하겠는가? 게다가 잘만 쓰면 오늘 저녁 점호 준비 열외인데, 슬쩍 이 수경의 눈치를 보니 알아서 하라는 거다. “알겠습니다. 이 수경님꺼 마무리하면 바로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려오겠습니다.”

 

훈련소 끝나고 자대 배치받고 본부 소대에 잠시 있을 때-예전 글에서 순경에서 맞을 때가 바로 이 때이다-, 본부 행정반 고참의 부탁으로 전역자들 감사장에 붓글씨를 써 준 게 발단이 되어 중대에 글 쓰는 놈 하나 들어왔다는 소문이 났다. 소대로 배치받은 후에는 같이 근무 나간 고참에게 나불대며 연애편지 상담한 것이 소대 고참들에게 좍 퍼지면서 연애편지 대필 사역이 어느덧 내 일과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고참들은 대놓고 편지 사역을 시키고, 중고참들은 같이 보초 근무를 나갈 때 조언을 얻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중간 고참들의 집합이 있을 때면 고참은 일부러 나를 편지 사역으로 빼서 집합 열외를 시켰고, 그게 괘씸하겠지만 그 중간 고참도 어차피 내가 필요하므로 집합 열외를 눈감아주는, 부록 같은 행복도 누리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대필해 주는 고참들 연애 상대들의 프로필과 스토리를 다 알기 때문에 때로는 졸병 주제에 연애 상담까지도 겸하게 되었다. 대필해 주는 고참 중 반 정도가 나보다 연상이지만 그중 숙맥이 또 반 정도이니 그들보다 한 수 혹은 두 수 위인 내 연애 경험(?)으로 나불대기 시작하면 그들도 별문제 없이 내 조언과 대필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잘 쓰지도 못하면서 조언도 안 받아들이는 고집불통의 고문관인 바로 위 고참 고(高) 일경이었다. 나 같은 나이롱 신자가 아니라 진짜배기 기독교인이며-졸병들에게 단 한번도 손찌검을 한 적이 없다- 내무반 바닥청소, 워커 닦기 그리고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까지 자주 붙어 다녀서 가끔 연애 조언도 해주게 되는데, 고지식하다는 자신의 문제는 알면서도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보내는 편지를 보면 다큐멘터리 일기에 가까웠다. 

 

“고 일경님, 이게 편지유? 보고서지.”

“알아. 니가 쓴 거 보고 내가 낯 간지러워 다시 고쳤어.”

“아이고, 내가 얼마나 순화한 건데…. 나, 그럼 손 떼요”

 

늘 이런 식이었다. 본인이 보기에도 뭔가가 아쉬워 고쳐 달라고 하면서도 막상 고치면 다시 원래대로 복원시켰다. 고 일경은 전북 고창 근처 출신의 정말 순진하고 고지식한 사내였고 그의 여자친구도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였기에 달달한 연애 감정이라곤 전혀 섞이지 않은 맹탕인 편지가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그 여자친구의 답장은 정성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고운 편지였기에 그런 꼴(?)을 못 보는 내가 직접 첨삭지도를 했지만, 알면서도 못 고치는 건 병이었다. 결국, 최후 방법을 썼다. 내가 직접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고 XX 일경님 직속 후임입니다. 어쩌고 저쩌고....... “. 

그런데 답장이 걸작이었다.” 이런 편지는 더 이상 안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깨갱’이었다. 알량한 글솜씨로 남의 여자친구에게 허락도 없이 편지를 보낸 최후는 처참했지만 많은 걸 배웠다. 결국, 마음이 중요한 것이구나. 아무리 건조한 글이라도 진정성 없는 사탕발림한 글보다 백 번 낫구나. 

그 사건 이후로 고 일경은 오히려 더 자주 그리고 조금 더 말랑말랑한 편지를 보냈고, 난 다시 일상 즉, 다른 고참들의 연애편지 대필로 돌아갔다. 

 

그것도 거의 매주 한 편의 드라마 각본을 써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편지 중에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군대 생활의 자잘하고 지질한 일상들을 감동적으로 그리려면 머리를 많이 굴려야 했다.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 연애편지 전문가가 되어 고참이 되어서도 연애편지계의 전설로 회자되면서 상경 이상 졸병들의 편지를 지도 편달(?)해주는 아주 모범적인 사병이 되었다는, 옛날 옛적 가제트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책을 좋아해서 책은 많이 읽었어도 쓰기는 좀처럼 하지 않은 경우가 바로 필자의 경우인데 공교롭게도 남의 연애편지 대필 수업을 통해 글쓰기에 입문하였으니 이런 경우를 일컬어 ‘남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다 손톱 저절로 깎인다. (가제트식 격언)’는 경우가 아닐까?


 

(사족)

이 글의 시점은 1982,83년 정도이다. 

당연히 핸드폰은 없고 전화도 공중전화를 이용해야만 하던 시절이었으며 그마저도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편지를 받는 여자들 입장에서 보면 연애편지가 대필임을 알아버렸을 때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다른 누군가가 같이 읽었다고 생각되면 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핑계를 대자면 당시는 전두환이 껄떡대던 시절이였고 구타가 다반사였던 시절이었다.

(기수 빠따라고 들어는 봤나?, 전경도 해병처럼 기수로 운영했었다)

힘든 군 생활 동안 돌파구는 필요했고, 연애는 간절히 하고 싶고, 혹은 누군가에게 소개는 받았고, 또는 편지로 관심은 끌고 싶은데 글을 잘 못 쓰는 사람 입장에선 편지 쓰는 게 고역이라는 걸 옆에서 보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편지에 넣을 문구의 초안을 써 준 것이고 고참들은 그 초안을 참조해서 직접 썼음을 알립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Leopictures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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