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기는 캘거리/편의점에서

캘거리 구멍가게 이야기 1 –Nancy 할머니

by 가제트21 2020. 1. 18.

날씨가 좋다는 이야기는 알아들었다.

다음 문장들은 입술 사이를 제대로 뛰쳐나오지 못한 채 Nancy 할머니의 입 가장자리를 맴돌다 가게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난 아는 척을 해야 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문장들 사이에서 힘을 내어 일어나 내 귀에 다다른 두 단어 ‘gift’와 ‘lost’로 유추해서 만든 응답은 ‘so, did you find?’란 유치원 아이들 수준의 어정쩡한 대꾸였다.

그런 뭉개진 독백과 유치원생의 대답이 오가는 시간대는 대체로 손님이 별로 없는 10시에서 11시쯤이다. 가끔 Nancy  할머니가 있는 동안 들어 오는 손님을 맞이할 때면 그 중얼거리는 독백 혹은 푸념을 주문과 결재 하는 사이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가? 난 못 알아듣는 그 중얼거림을 다른 손님들은 대충 듣고도 잘도 응답한다.

 

‘Gift’는 다시 중얼거림 속으로 파묻혔다. 이젠 옆집 남자도 나오고 조금 후엔 딸도 나오고, 이러다간 저 중얼거림 안에서 할머니가 아는 사람들이 다 나올 기세다.

손님이 계속 없으면 난 저 중얼거림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단할 수가 없었다. 웅얼거림을 두껍게 둘러싼 외로움이 졸졸 흐르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Nancy는 두꺼운 외로움을 나와 얘기하면서 조금씩 흘리는 중이다.

비록 5분 혹은 10분 이내의 짧은 시간이고 무슨 뜻인지 잘 알아먹지 못하는 동양인이지만 매일 찾아와서 머핀 하나와 사탕 봉지 하나 사는 또 하나의 이유로 보인다.

오더가 많거나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은 솔직히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런 날은 대충 대답을 하지만 할머니는 그 대충에도 만족하곤 했다.

줄줄 새는 게 깨작깨작 새는 것으로 바뀌겠지만 말하는 그 순간부터 조금씩이나마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내 얼굴을 보면서 얘기한 적은 없다.

문에 달린 창을 통해 밖을 쳐다보면서 얘기한다.

눈에 고인 추억들이 흔들리며 흐르는 걸 느낀 건 그 중얼거림에 딸의 이름이 나온 후였다.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마치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의 어느 이름 없는 도시 이름을 말하듯 퀘벡이라고 얘기했다.

10년 좀 넘었다고 했다. 다시 그 중얼거림이 시작되었지만 10 years는 분명히 들렸다. 

 

이민 17년이 조금 넘은 나, 딸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Nancy, 50대 후반의 동양인과 70을 바라보는 노랑머리 할머니의 짧고 묘한 동거. 더 깊어진 중얼거림 속에서 흐르는 향수(鄕愁)(여기선 鄕水가 어울릴 수도). 

조금 더 물어보면 그리움이 마구 쏟아질 것 같았다.

 

얼른 날씨로 화제를 바꿨다.

퀘벡은 캘거리보다 더 춥다면서요?

Nancy는 이제 얼굴을 돌려 대답한다. ‘Maybe… but I feel cold.’  

Nancy 얼굴 위로 결국 오마니가 살짝 겹쳐서 들어온다.

서울이 캘거리보다 더 추울까?

외로우면 더 춥겠죠, 오나미.

 

외로우면……

오전 한가한 시간대에 의자에 앉아서 찍은 가게의 앞 부분

 

'여기는 캘거리 > 편의점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장이 바뀔 담배  (0) 2020.01.16
간지나는 개  (1) 2020.01.16

댓글